국경을 넘는 치료, 그 앞에서 깨달은 ‘당연함’의 가치
국경을 넘는 치료, 그 앞에서 깨달은 ‘당연함’의 가치 스무 살, 일본항공사(JAL)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단기 유학을 떠났다. 그때 처음 해외에 발을 내디딘 이후 나는 꽤 오랜 시간을 국경 바깥에서 살아왔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여행 인솔자로, 그리고 각종 연수단 통역이라는 역할로 세계 여러 나라를 오갔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어느덧 46년이다.
국경을 넘는 치료,
그 앞에서 깨달은 ‘당연함’의 가치
스무 살, 일본항공사(JAL)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단기 유학을 떠났다. 그때 처음 해외에 발을 내디딘 이후 나는 꽤 오랜 시간을 국경 바깥에서 살아왔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여행 인솔자로, 그리고 각종 연수단 통역이라는 역할로 세계 여러 나라를 오갔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어느덧 46년이다.
이 시간은 단순한 ‘여행 횟수’로 환산될 수 있는 종류의 경험이 아니었다. 반복해서 공항을 지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다른 사회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오기를 거듭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긴 흐름 속에서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체감해왔다. 세상은 변하고, 나라는 달라지고, 그 변화는 결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는 사실을.
초창기 해외 경험에서 한국은 지금처럼 또렷한 이미지의 나라가 아니었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반응 역시 지금처럼 즉각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먼저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가 한국을 알고 있었고, 오히려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그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축적되어 왔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을 46년이라는 시간 동안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셈이다.
그런 나에게 이번 멕시코 여행은 또 다른 종류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카보 산 루카스의 거리에서 마주한 수많은 약국들, 국경 근처에서 들은 ‘어금니 도시’ 이야기, 그리고 여러 의료 관광 도시들. 이 모든 풍경은 흥미롭기만한 이국적인 장면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관광이 아니라 치료를 위해 국경을 넘고 있었다.
미국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의료비를 피해, 더 저렴한 약과 치료를 찾아 멕시코로 이동하는 사람들. 약국 앞에 줄을 서 있는 관광객들, 치과 치료를 위해 국경을 걸어서 넘는 환자들. 그 모습은 낯설면서도, 동시에 묵직한 현실감을 안겨주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기술을 가진 나라에서, 정작 그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비용’이라는 또 다른 장벽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국경을 넘는다. 의료 서비스가 ‘자국 내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 ‘국경을 넘어서 찾아야 하는 선택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 장면을 보며 느낀 감정은 그저 비교 우위에서 오는 만족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충분한 기술과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닿지 못하는 구조. 그 틈에서 누군가는 이동해야만 하는 현실.
그리고 그 대비 속에서,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이 떠올랐다.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의료가 ‘이동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머물러도 닿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아프면 병원을 찾고, 비교적 합리적인 비용으로 진료를 받고, 필요한 치료를 이어갈 수 있다.
이 ‘당연함’은 사실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여러 나라를 오가며 살아온 시간 속에서, 나는 각국의 시스템이 얼마나 다르게 작동하는지를 보아왔다. 어떤 곳은 접근성이 부족했고, 어떤 곳은 비용이 장벽이 되었으며, 또 어떤 곳은 서비스의 질이 균일하지 않았다.
그런 경험들이 쌓일수록,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단지 편의성을 넘어 하나의 ‘균형 잡힌 구조’로 보이기 시작했다. 접근성, 비용, 서비스의 질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시스템. 그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사회 전체가 쌓아온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그 가치를 더 또렷하게 실감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외국에 나가보면 애국심이 생긴다”는 말이 다소 진부하게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왜 생겨났는지 알 것 같다. 그것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비교와 체험이 축적된 끝에 도달하는 아주 현실적인 감정이다.
46년 동안 세계를 오가며 수많은 장면을 보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마주한 풍경은 유난히 오래 남는다. 화려한 바다보다, 번쩍이는 네온사인보다,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 깊게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장면은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나는 지금 어떤 시스템 안에 살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나는 굳이 국경을 넘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