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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 위에 얹은 역사, 바다에서 찾은 자유 — 제노바의 주세페 베르디

주세페 베르디가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사회에 기여한 삶을 살펴보고, 제노바에서 보낸 시간과 그곳이 그의 작품과 일상에 미친 영향을 다룬다.

제노바를 사랑했던 주세페 베르디

한 국가는 자신들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가릴 때 단지 기술적 천재성이나 예술적 성취만을 보지 않는다. 그 인물이 시대의 아픔에 어떻게 응답했는지, 자신의 영향력을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어떻게 사용했는지가 평가의 기준이 된다. 2010년 이탈리아 국영 방송(RAI)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대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인’ 투표에서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가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이어 최종 2위에 오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베르디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거장 중 한 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분열과 외세의 지배라는 암울한 현실 앞에 행동으로 응답했던 ‘행동하는 지식인’이자 애국자였다. 그리고 화려한 조명과 정치적 소란에서 벗어나 영혼의 자유를 얻고 싶을 때마다 찾았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리구리아 해의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항구도시 제노바(Genoa/Genova)였다.

붓 대신 악보를 든 혁명가: 행동하는 지식인 베르디

19세기 중반 이탈리아는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다. 외세 오스트리아의 지배와 여러 소국(小國)들로 갈라진 분열의 땅이었다. 당대 이탈리아인들에게 자유와 통일에 대한 열망은 간절했으나, 외세의 탄압과 검열은 삼엄했다. 이 시기 베르디가 발표한 오페라 《나부코》(1842)의 제3막에 등장하는 ‘노예들의 합창(Va, pensiero)’은 조국을 잃고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바빌론 포로들의 노래였지만,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억압을 받던 이탈리아 국민들의 마음을 대변한 애국가나 다름없었다.

“날아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오, 나의 조국, 빼앗긴 내 고향이여!”

오페라 《나부코》 중 ‘노예들의 합창’

이 노래는 극장에서 불릴 때마다 이탈리아인들의 눈시울을 적셨고, 통일 운동(리소르지멘토, Risorgimento)의 들불을 지폈다. 당시 이탈리아 거리에는 “Viva V.E.R.D.I.!”라는 구호가 담벽에 새겨지곤 했는데, 이는 작곡가 베르디를 찬양함과 동시에 통일 이탈리아의 첫 국왕이 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지지하는 민중의 암호(Viva Vittorio Emanuele Re D'Italia)였다.

베르디는 상징적 인물로만 남아있지 않았다.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이었던 카보우르(Cavour) 수상의 강력한 권유를 받아들여 1861년 통일 이탈리아의 첫 의회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비록 의회 정치의 생리에 깊이 신물나하기도 했으나, 그는 국가의 재건과 사회 제도 개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말년에는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으로 은퇴한 가난한 음악가들을 위한 양로원인 ‘음악가들의 휴식처(Casa di Riposo per Musicisti)’를 설립하고, 자신의 유골 또한 그곳에 안치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책임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완벽하게 실천했다.

왜 제노바인가: 바다가 준 침묵과 영감

이처럼 무거운 역사적 책임과 예술적 중압감 속에서 살았던 베르디에게 제노바는 따뜻하기만 한 휴양지가 아니었다. 그의 고향인 포 강 평원의 산타 가타(Sant'Agata) 시골집은 겨울이면 혹독한 추위와 짙은 안개로 가득 찼고, 밀라노는 늘 사교계의 스캔들과 정치적 참견으로 번잡했다. 베르디가 추위와 번잡함을 피해 찾은 안식처가 바로 해양 도시 제노바였다.

베르디는 1853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00년 무렵까지 약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매년 겨울과 봄을 제노바에서 보냈다. 처음에는 카리냐노 언덕의 팔라초 사울리(Palazzo Sauli)에 머물렀고, 1877년 이후에는 제노바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웅장한 역사적 저택 팔라초 도리아 팜필리(Palazzo Doria Pamphilj)의 넓은 층을 임대하여 겨울 보금자리로 삼았다.

제노바와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

제노바에 대한 베르디의 애정은 그의 작품에도 깊게 투영되어 있다. 제노바 공화국의 초대 총통이자 해양 영웅이었던 시몬 보카네그라의 삶을 다룬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Simon Boccanegra)가 대표적이다. 베르디는 제노바의 바다와 해양 역사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으며, 제노바에서 겨울을 보내며 이 작품을 대대적으로 개작하여 완성도 높은 명작으로 탈바꿈시켰다.

제노바의 온화한 기후와 넓은 바다는 베르디의 지친 영혼과 약해진 호흡기에 깊은 위안을 주었다. 그는 항구에서 솟아오르는 이른 아침의 물안개와 지중해의 일몰을 바라보며 시대를 관통하는 명작들의 아이디어를 다듬었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최고봉을 오페라화한 《오텔로》(Otello)와 생애 마지막 희극 오페라 《팔스타프》(Falstaff)의 주요 부분들이 바로 제노바의 조용한 겨울날에 구상되고 완성되었다.

제노바에서의 일상과 인간 베르디의 에피소드

제노바에서 베르디는 ‘국민적 영웅’이나 ‘대음악가’로서의 엄숙한 가면을 벗고, 소탈하고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제노바 시민들 역시 그를 거창한 대스타로 다루기보다 자신들의 이웃으로 존중해 주었다.

[에피소드 1: 항구의 산책자와 비밀스러운 커피 한 잔]

베르디는 매일 아침 수염을 덥수룩하게 키우고 넓은 챙의 모자를 쓴 채 제노바 항구 주변과 골목길(Caruggi)을 홀로 산책하곤 했다. 항구의 선원들과 상인들은 그가 누구지 알면서도 모른 척 지나쳐 주는 묵묵한 배려를 보였다. 베르디는 제노바의 오래된 카페인 ‘카페 만지니(Caffè Mangini)’나 ‘카페 데이 갈리아니’에 들러 시가를 피우며 조용히 신문을 읽곤 했다. 한 번은 외지의 관광객이 그를 알아보고 다가와 감격해하자, 베르디는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로

“나는 그저 바다 구경을 하러 온 농부일 뿐이오”라며 유쾌하게 손을 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에피소드 2: 증기선과 철도, 시대를 앞서간 현대인]

제노바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현대적인 산업 및 교통의 중심지였다. 베르디는 제노바 항구에 드나드는 최신 증기선과 새롭게 개통된 철도 시스템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는 기술적 진보와 문명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개혁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제노바에서 밀라노, 파리, 토리노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던 철도망은 베르디가 유럽 전역의 음악계와 소통하면서도 자신만의 독립된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핵심 수단이었다.

[에피소드 3: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고집스러운 사생활]

제노바의 대표적인 극장인 테아트로 카를로 페르디체(Teatro Carlo Felice)는 국민 작곡가 베르디를 위한 전용 특별석을 제공하려 했다. 하지만 베르디는 자신의 음악이 상업적으로 과하게 이용되거나, 극장에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타인의 시선을 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는 일반 관객석의 표를 직접 구입하여 몰래 들어가 공연을 관람하거나, 제노바에서는 가능하면 작품 활동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오롯이 재충전의 시간으로 삼고자 했다.

삶의 주인으로 살았던 거장의 유산

주세페 베르디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그는 뛰어난 예술가였으나 예술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자신을 쇄국하지 않았다. 시대를 아파할 줄 아는 사회적 주체로서 역사와 정치에 적극적으로 발을 내디뎠으며, 동시에 세상의 과도한 찬사와 소란에 휘둘리지 않고 제노바의 바닷가에서 자신만의 시간과 평정을 스스로 선택하고 지켜낸 ‘삶의 주인’이었다.

자신의 시간을 주체적으로 활용하고, 타인과 사회를 향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푸른 지중해의 항구도시에서 인생의 겨울을 아름답게 가꾸었던 베르디. 그가 제노바의 바다를 바라보며 다듬었던 것은 단지 아름다운 악보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완성해 나간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삶의 기록 그 자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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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옥 작가글 59편 · 한국어로 씁니다

울타리없는학교 교장 / 크루즈 여행 전문 인솔자 010-3261-7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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