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품은 남장 여자, 잔 바레와 종이꽃 부겐빌레아
세계를 품은 남장 여자, 잔 바레와 종이꽃 부겐빌레아 2024년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프랑스를 빛낸 ‘황금 여성 10인’이 소개되었다. 그중 다섯 번째로 호명된 이름, 잔 바레(1740~1807)는 많은 이들에게 다소 낯설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을 몰라도, 부겐빌레아 꽃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이 꽃을 처음 발견한 이가 바로 잔 바레이며
세계를 품은 남장 여자, 잔 바레와 종이꽃 부겐빌레아
2024년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프랑스를 빛낸 ‘황금 여성 10인’이 소개되었다. 그중 다섯 번째로 호명된 이름, 잔 바레(1740~1807)는 많은 이들에게 다소 낯설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을 몰라도, 부겐빌레아 꽃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이 꽃을 처음 발견한 이가 바로 잔 바레이며, 그녀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한 여성이다.
잔 바레는 18세기 프랑스의 농촌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뛰어난 관찰력과 약초 지식을 바탕으로 식물에 대한 남다른 이해력을 키웠다. 그녀의 삶은 왕실 박물학자였던 필리베르 코메르송을 만나면서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바레는 그의 가정부이자 연구 보조로 일하며 점차 식물학 연구의 실질적인 동반자가 되었고, 조수를 넘어 현장 채집과 표본 제작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남장 뒤에 숨긴 뜨거운 지성: 최초의 여성 세계일주가
1766년, 계몽주의의 열기가 유럽 전역을 적시던 프랑스에서 루이 15세의 명으로 프랑스 최초의 세계 일주 원정대가 조직되었다. 탐험가 루이 드 부겐빌이 이끈 이 야심 찬 항해에는 한 명의 ‘금기’가 숨어 있었다. 식물학자 필리베르 코메르송의 조수, 잔 바레(Jeanne Baret)였다.
당시 여성의 승선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흙을 만지고 식물을 연구하며 평생을 살아온 잔 바레에게 성별이라는 장벽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증을 막지 못했다. 그녀는 가슴을 붕대로 동여매고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이름도 남성의 이름인 ‘진 바렛’으로 바꾸었다.
이후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녀는 300명의 거친 선원들 사이에서 항해를 견뎌냈다. 누구보다 먼저 험난한 지형을 올랐고, 다리가 불편한 코메르송을 대신해 수천 종의 식물을 채집했다. 그녀의 손끝에는 늘 흙이 묻어 있었고, 가슴 속에는 들켜서는 안 될 비밀보다 더 뜨거운 학구열이 요동치고 있었다.
찬란한 발견: 우리가 사랑하는 ‘부겐빌레아’의 어머니
잔 바레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우리 곁에 피어 있는 부겐빌레아(Bougainvillea)다. 남아메리카 브라질의 거친 숲속에서 그녀가 이 꽃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환희를 상상해 본다. 종이처럼 얇고 바스락거리는 질감 덕분에 '종이꽃(Paper Flower)'이라 불리는 이 식물은 사실 반전이 숨어 있다. 화려한 분홍빛과 보랏빛으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꽃잎이 아니라, 꽃을 보호하기 위해 변형된 잎인 ‘화포(花苞)’이다. 진짜 꽃은 그 화포 속에서 작고 수줍게 하얀 얼굴을 내민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타인의 이름, 즉 선장 부겐빌의 이름으로 이 꽃을 세상에 알렸던 잔 바레의 삶은 어쩌면 이 부겐빌레아를 닮아있다. 화려한 겉모습(남장) 뒤에, 소박하지만 단단한 진실(여성 과학자로서의 자아)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역사가 기억하는 이름, 솔라눔 바르티에
결국 그녀의 성별은 항해 도중 타히티 원주민들에 의해 밝혀졌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를 기소하거나 비난할 수 없었다. 그녀가 채집한 6,000여 점의 표본과 헌신적인 연구 성과는 당시의 편견을 압도할 만큼 위대했기 때문이다. 훗날 프랑스 해군 정부는 그녀에게 연금을 수여하며 그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2012년, 남미에서 발견된 감자과 식물에 'Solanum baretiae'라는 이름이 붙여지면서 그녀의 이름은 마침내 과학적으로 영구히 기록되었다. 2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식물 위에 새길 수 있었던 것이다.
꽃말에 담긴 마음: 열정과 평화
부겐빌레아는 어떤 곳에서는 '열정적인 사랑'을, 어떤 곳에서는 '평화'를 상징한다. 18세기라는 시대의 한계를 깨고 대양을 건넜던 한 여성의 용기는 분명 열정이었고, 그 열정이 남긴 아름다운 꽃들은 세상을 평화롭게 물들였다. 다음에 길가에서 부겐빌레아를 마주한다면, 화려한 색감 아래 숨겨진 작은 꽃을 한 번 들여다보길 바란다. 그리고 기억해 주기를. 이 꽃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붕대를 감고 파도를 건넜던, 세상에서 가장 강인했던 식물학자, 잔 바레의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