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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가 그리고, 파가니니가 노래한 길

제노바 비아 가리발디의 역사와 로리 시스템, 루벤스의 건축 기록을 소개한다. 팔라초 도리아 투르시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일 카노네’에 얽힌 이야기도 다룬다.

지중해의 푸른 물결을 품은 이탈리아 북서부의 항구도시 제노바(Genova). 이곳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단 하나의 ‘도로’ 전체와 그 길을 둘러싼 저택군이 도시 전체의 특정 구역을 넘어 통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독특한 공간이 존재한다. 한때 '스트라다 누오바(Strada Nuova, 새로운 길)'로 불리다가, 오늘날에는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이름을 따서 ‘비아 가리발디(Via Garibaldi)’로 명명된 곳이다.

길이 250여 미터에 불과한 이 짧은 도로에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호령했던 제노바 공화국의 막강한 부와 예술, 그리고 인류 건축 및 음악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거장들의 이야기가 촘촘히 얽혀 있다.

지중해의 금융 제국: 제노바 공화국의 번성과 ‘로리 시스템’

16세기, ‘으뜸가는 도시(La Superba)’라는 칭호로 불리던 제노바 공화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금융과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스페인 제국에 거대한 자금을 대출해 주며 유럽의 뱅커(Banker) 역할을 자처했던 제노바의 신흥 귀족들과 금융 가문들은 그들의 부와 세력을 가시적으로 증명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550년대, 중세의 어둡고 비좁은 골목을 벗어나 도시 북쪽에 대담하고 정교하게 도시 계획된 신도시 도로를 건설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스트라다 누오바'의 시작이었다.

이곳에 들어선 오차 없는 대칭과 화려한 중정(Courtyard), 정원을 갖춘 르네상스·바로크 양식의 궁전들은 단지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저택 역할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시 제노바 공화국은 국가를 방문하는 국빈이나 외교관, 국가적 귀빈을 맞이하기 위해 아주 특별한 국빈 숙박 제도를 운용했는데, 이를 ‘로리 시스템(Le Strade Nuove e il sistema dei Palazzi dei Rolli)’이라 부른다.

공화국 정부는 귀족 저택들의 규모와 화려함에 따라 등급을 매겨 명부(Rolli)에 등록했다. 국가적 국빈이 도착하면 추첨을 통해 당첨된 귀족 가문이 자신의 저택을 제공하여 왕과 대사들을 접대하게 했다. 이는 민간의 부로 국가의 외교적 품격을 증명한 인류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국가 환대 시스템을 가동한 것이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국가적 자부심이 걸린 일이었기에 귀족들은 다투어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화가들을 동원해 저택을 조각과 벽화로 장식했다. 이 귀빈 접대용 공식 저택 명부인 ‘로리(Rolli)’ 시스템에 등록되었던 궁전들이 늘어선 거리가 바로 비아 가리발디이며, 그 독창적인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거장 루벤스의 눈: 오늘날 안내 간판과 도록의 초석이 되다

비아 가리발디의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고 오늘날 인류의 유산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데에는 17세기 플랑드르 출신의 바로크 거장 화가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공헌이 결정적이었다.

1600년대 초 제노바를 방문한 루벤스는 스트라다 누오바에 들어선 궁전들의 혁신적인 구조와 기하학적 아름다움, 조명과 공간 활용의 미학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다만 눈으로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저택들의 도면, 단면도, 외관 장식을 직접 스케치하고 측량하여 1622년 안트베르펜에서 《제노바의 궁전들(Palazzi di Genova)》이라는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루벤스가 남긴 유산: 현대 안내 도록의 원형

루벤스가 펴낸 이 책은 한낱 그림책이 아니었다. 건물의 실측 도면과 공간 배치를 정밀하게 기재하여, 유럽 전역의 건축가와 귀족들에게 ‘도시 저택이 갖추어야 할 이상적인 표준’을 제시한 일종의 가이드북이자 가시적 건축 도록이었다. 건물의 입구에 상세한 구조와 역사적 의의를 알리는 현대적인 ‘문화재 안내간판’ 및 ‘여행 안내 도록’의 초석이 바로 루벤스의 이 집념 어린 작업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청사에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의 전설: 파가니니와 ‘일 카노네’

비아 가리발디의 우아한 궁전들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바로 1565년에 세워진 ‘팔라초 도리아 투르시(Palazzo Doria Tursi)’이다. 웅장한 아치와 유려한 계단으로 유명한 이 저택은 현재 제노바의 시청사(Palazzo Municipio)이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시청사 내부의 보물실에는 음악 역사의 위대한 전설 하나가 고요히 숨 쉬고 있다. 바로 제노바가 낳은 세기의 바이올린 거장,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렸던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ini, 1782~1840)가 생전에 그토록 아꼈던 전설적인 바이올린 ‘일 카노네(Il Cannone, 대포)’가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1743년 명장 과르네리(Guarneri del Gesù)가 제작한 이 바이올린은 폭발적인 음량과 깊고 어두운 울림 때문에 파가니니에 의해 ‘대포’라는 별명이 붙어졌다. 파가니니는 사망하면서

“내 분신과도 같은 이 바이올린을 고향 제노바 시에 기증하되, 영원히 보존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오늘날 제노바 시청사는 이 명기를 박물관 유리관 속에 묵혀두지 않는다. 목재가 고사하는 것을 막고자 정기적으로 전문 연주자의 손길을 거쳐 숨을 불어넣으며, ‘파가니니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우승자에게만 이 전설적인 악기를 품에 안을 특권을 허락한다.

2015년, 한국인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우승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역시 이 무대에서 ‘대포’를 연주하며 역사적인 쾌거를 남겼다. 시청사의 르네상스 석조 벽면을 울리는 이 깊은 진동은, 제노바의 위대한 유산이 오늘날의 예술가들과 호흡하며 가장 감동적인 대화를 나눈다.

시간의 길 위에서 나누는 대화

비아 가리발디를 걷는다는 것은 그저 잘 보존된 호사스러운 옛 거리를 구경하는 여행이 아니다. 250미터의 돌길 위에서 우리는 지중해를 호령했던 해양 제국의 거대했던 부와, 국빈을 맞이하던 시민들의 당당한 자부심, 거장 루벤스가 스케치북을 들고 매료되었던 예술적 안목, 그리고 시청사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파가니니의 열정적인 선율을 동시에 만난다. 수세기에 걸쳐 풍성하게 차려진 이 성대한 문화의 성찬 속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길 위에서 입체적으로 교차하는 아주 특별한 시공간적 축제에 초대받은 셈이다.

도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이자 역사책인 비아 가리발디. 시대를 통찰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기록하고자 하는 지성인에게 제노바의 이 새로운 길(Strada Nuova)은, 지나간 과거가 어떻게 오늘날의 위대한 문화적 유산으로 승화되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해 보여주는 가장 찬란한 이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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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옥 작가글 59편 · 한국어로 씁니다

울타리없는학교 교장 / 크루즈 여행 전문 인솔자 010-3261-7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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