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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의 부활과 빙켈만: 고고학의 아버지가 남긴 유산

1709년 이탈리아 남부, 베수비오산 서쪽 기슭의 작은 마을 레지나. 수도원 마당에서 우물을 파던 일꾼은 땅속에서 하얀 대리석 조각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파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그는 곧 다시 땅속에 묻어버렸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 돌조각이 1700년 전 로마 제국의 도시에서 온 편린이라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30년 후인 1738년 봄,

 
1709년 이탈리아 남부, 베수비오산 서쪽 기슭의 작은 마을 레지나. 수도원 마당에서 우물을 파던 일꾼은 땅속에서 하얀 대리석 조각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파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그는 곧 다시 땅속에 묻어버렸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 돌조각이 1700년 전 로마 제국의 도시에서 온 편린이라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30년 후인 1738년 봄, 또 다른 우연이 역사를 열었다.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쇠붙이를 발견했고, 그것이 고대의 수도관임이 드러났다. 곧 나폴리 왕국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네의 관심을 받아 발굴이 시작되었다. 군 공병대 지휘관 알쿠비에르는 폭약을 사용해 바위를 뚫고, 결국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매몰된 옛 도시 헤르쿨라네움을 찾아냈다. 청동 조각과 석비, 그리고 ‘헤르쿨레늄 극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돌이 증거였다.
 

 
1748년, 알쿠비에르는 다시 베수비오산 기슭의 또 다른 지역을 파헤쳤다. 그곳에서 화려한 프레스코 벽화와 조각, 그리고 화산재 속에 단단히 굳은 채 발견된 희생자의 주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움켜쥔 금화와 함께 굳어버린 시신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러나 발굴은 학문적 관심보다 ‘보물찾기’의 성격이 짙었다. 출토품은 모두 왕에게 바쳐졌고, 건물과 벽화는 무지한 곡괭이에 의해 훼손되거나 다시 묻히곤 했다.
 

 
이때 독일 출신 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이 등장한다. 1755년, 그는 집에서 로마 시대의 기록을 읽던 중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다. 소(小) 플리니우스의 편지 속에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상황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를 통해 발굴된 지하 도시가 바로 고대 도시 ‘폼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인류 역사 속에서 폼페이의 이름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빙켈만은 1758년 알바니 추기경의 고대 유물 관리인이 되었고, 이어 1763년 로마 일대의 고대 유물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학문적 열정으로 폼페이를 찾아가 발굴 현장을 살펴보고자 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현장에서는 과학적 조사나 보존이 아닌 무분별한 발굴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꾼들은 함부로 파헤쳐 유물을 왕에게 바치거나 사적으로 빼돌렸고, 귀중한 건축물과 벽화는 파괴되었다.
 
이에 분노한 빙켈만은 나폴리 국왕 샤를르에게 직접 호소했다. “전하, 폼페이는 인류 전체의 유산입니다. 그곳에서 나온 유물은 단순한 보물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연구할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왕은 오히려 그를 꾸짖었다. “이 땅은 내 땅이고, 출토품은 내 것이다.” 결국 빙켈만은 현장에서 쫓겨나고, 다시는 공식적으로 폼페이를 조사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몰래 현장 감독에게 돈을 주고 발굴지를 둘러보며 기록을 남겼다. 이 과정을 통해 얻은 지식을 정리해 1762년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하여』, 그리고 1764년 『고대 미술사』를 집필했다. 특히 후자는 인류 최초의 ‘예술사 체계서’로 평가받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 미술을 역사적 맥락과 양식으로 분석한 혁신적 저술이었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발굴은 단순히 유물을 모으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대 사회의 생활, 문화, 예술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었다. 빙켈만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다. 그는 발굴 유물의 형태와 양식을 분석해 시대적 특징을 구분하고, 예술을 단순한 미적 대상이 아닌 역사적 산물로 이해했다. 이러한 시도는 훗날 고고학과 미술사라는 학문이 정립되는 기초가 되었다.
 
만약 빙켈만이 단순히 왕의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면, 폼페이는 오랫동안 ‘왕의 보물창고’ 정도로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그 덕분에 폼페이는 ‘과학적 발굴’과 ‘예술사 연구’라는 새로운 관점 속에서 빛을 되찾게 되었다.
 

 
오늘날 폼페이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수많은 이들이 찾는 관광지이자 학문의 현장이 되었다. 화산재 속에 잠들어 있던 고대의 도시와 예술은, 빙켈만이라는 한 학자의 집념 덕분에 인류의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그가 ‘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칼럼리스트 김은옥 ruthkim@empal.com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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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옥 작가글 59편 · 한국어로 씁니다

울타리없는학교 교장 / 크루즈 여행 전문 인솔자 010-3261-7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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