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마와 안익태 선생 — 지중해에 남은 애국가의 선율
팔마와 안익태 선생 — 지중해에 남은 애국가의 선율 스페인 지중해의 보석, 마요르카(Mallorca) 바르셀로나에서 남동쪽으로 배로 약 7~8시간, 비행기로는 불과 20분 거리에 자리한 이 섬은 남국의 햇살이 눈부신 휴양지다. 섬의 수도 팔마 데 마요르카(Palma de Mallorca)는 이름 그대로 ‘마요르카의 야자수’라는 뜻을 지닌다. 지명부터 이미
팔마와 안익태 선생 — 지중해에 남은 애국가의 선율
스페인 지중해의 보석, 마요르카(Mallorca)
바르셀로나에서 남동쪽으로 배로 약 7~8시간, 비행기로는 불과 20분 거리에 자리한 이 섬은 남국의 햇살이 눈부신 휴양지다. 섬의 수도 팔마 데 마요르카(Palma de Mallorca)는 이름 그대로 ‘마요르카의 야자수’라는 뜻을 지닌다. 지명부터 이미 따뜻한 바람과 푸른 하늘, 그리고 여유로운 남쪽의 정취가 묻어난다. 제주도보다 조금 큰 이 섬은 연간 천만 명 이상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지이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이름으로 기억된다. 바로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安益泰) 선생의 마지막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지휘자의 길, 세계를 무대로
190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평양종로보통학교와 숭실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1921년 일본으로 유학했다.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서 음악특기생으로 공부했으며, 1926년에는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현 구니타치 음악대학)에 진학해 첼로를 전공했다. 1930년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를 배우며 한인 교회의 음악감독으로도 활동했다.
1938년에는 아일랜드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고, 이후 헝가리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우며 유럽 각지에서 활동했다. 전쟁 전후의 혼란기에도 그는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꾸준히 지휘자로 무대에 섰다. 당시 동양인 음악가가 유럽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기에, 그의 존재는 일찍부터 국제적이었다.
전쟁의 피난, 그리고 마요르카로의 인연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안익태는 프랑스 라디오 오케스트라와의 연주회를 준비하던 중 연합군이 파리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전쟁을 피해 피난처를 찾아야 했던 그는 스페인 대사관의 도움으로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스페인은 당시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기에 비교적 안전했고, 음악활동도 이어갈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맞이한다.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의 백작이 문화인을 초대하던 저택에서, 그 딸 마리아 돌로레스 탈라베라(María Dolores Talavera)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다. 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롤리타’라는 애칭으로 불렸고, 두 사람은 두 해 동안의 연애 끝에 1946년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지중해의 섬, 마요르카를 평생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팔마의 음악가, 안익태
당시 마요르카는 음악 불모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안익태는 포기하지 않았다. 팔마 시 정부와 지역 유지들을 설득해 마요르카 교향악단을 창단했고, 스페인 내에서 동양인 지휘자로서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펼쳤다. 그의 헌신은 이 섬의 음악 문화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팔마 중심 번화가에는 안익태 선생의 탄신 100주년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높이 5.5m, 너비 7.8m의 철제 조형물은 ‘음파, 날개, 파도’를 상징하며, 시공을 초월한 음악의 흐름을 형상화했다. 안내판에는 선생의 초상과 주요 업적, 그리고 한국어·영어·스페인어로 새겨진 <애국가> 악보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팔마 외곽의 남쪽 해변에는 ‘안익태 거리(Carrer D’Eaktai Ahn)’도 있다. 지중해의 바람과 꽃향기가 감도는 이곳에는 조용한 주택과 호텔이 늘어서 있다. 원래 시 정부는 시내 중심부에 이름을 붙이려 했으나, 거리명이 이미 포화 상태여서 현재의 위치로 정해졌다고 한다.
마요르카의 집, 그리고 사랑의 마지막 시간
세월이 흐르며 안익태 가족의 형편은 어려워졌고, 고택을 매각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이때 한국의 기업인 권영호 인터불고 회장이 1990년 집을 구입해 기념관으로 조성한 뒤 한국 정부에 기증했다. 지금도 그 집 안에는 안익태의 연주 사진, 악보, 가족과의 단란한 순간들이 전시되어 있다. 롤리타 여사는 남편 서거 후 40여 년간 그 집을 지켰고, 2009년 남편 곁으로 조용히 떠났다.
그녀는 2005년 마지막 한국 방문길에 “애국가가 한국 국민의 가슴에 영원히 불리기를 소망하며, 이 곡의 저작권을 한국 국민에게 기증합니다.”라는 글을 남기며 평생의 동반자이자 조국을 향한 남편의 뜻을 이어갔다.
애국가의 탄생과 논란
안익태가 작곡하기 전까지, 애국가는 작사 미상의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멜로디를 붙여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외국 민요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기에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새로운 선율을 썼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의 장중하고도 품격 있는 멜로디가 탄생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평가에는 그림자도 드리워졌다. 2006년, 그가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곡을 작곡하고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영상이 공개되며 친일 논란이 제기되었다. 2009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을 수록했고, 일부에서는 그가 작곡한 교가의 사용 중단을 주장하기도 했다. 한때 ‘국가의 음악가’로 추앙받았던 그의 이름이 논란 속에 흔들리자, 1994년 탄생 88주기를 기념해 열렸던 안익태 음악제도 2000년대 들어 흐지부지되었다.
빛과 그림자 사이의 음악가
안익태 선생은 분명 복합적인 인물이다. 한편으로 그는 조국을 생각하며 애국가를 작곡한 음악가였고, 또 한편으로는 시대의 거센 파도 속에서 생존과 명예를 위해 복잡한 선택을 해야 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한 예술가가 세계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이자, 분단과 식민의 시대를 산 한 인간의 초상이다. 팔마의 햇살 아래, 그의 음악은 여전히 지중해의 바람 속에 흩날린다.
마요르카의 거리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함께, 그가 남긴 선율은 오늘도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조국을, 그리고 음악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