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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시칠리아인이다.”

시칠리아가 겪은 역사적 차별과 마피아의 확산, 리베로 그라시와 팔코네·보르셀리노의 희생을 살펴봅니다. 시민 연대와 아디오피조 운동을 통해 변화한 오늘날 팔레르모의 모습을 전합니다.

팔코네-보르셀리노 공항 : 피로 쓴 정의, 자존감을 되찾은 시칠리아의 서사

이탈리아의 주요 공항들은 해당 도시나 지역 출신의 유명 인사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경향이 강하다. 피사의 ‘갈릴레오 갈릴레이’,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 볼로냐의 ‘굴리엘모 마르코니’ 공항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시칠리아의 관문인 팔레르모 공항은 누구의 이름을 따왔을까? 그곳은 위대한 예술가나 탐험가가 아닌, 마피아 소탕에 평생을 바치다 희생된 팔레르모 출신의 두 법조인을 기리는 ‘팔코네-보르셀리노 공항(Falcone-Borsellino Airport)’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만나게 되는 이 공항의 이름은 예사로운 지명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마피아의 그늘 아래 신음하던 시칠리아인들이 공포와 침묵의 규율을 깨부수고, 스스로의 손으로 사회를 정화해내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싸워왔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당당한 훈장이자 용기의 선언이다.

"나는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시칠리아인이다." – 자부심 뒤에 숨은 역사적 상처

시칠리아 사람들에게 자치성과 정체성은 목숨과도 같다. 그들이 스스로를 ‘이탈리아인’보다 ‘시칠리아인(Siciliano)’으로 정체성 매김 하는 배경에는 오랜 통합의 상처와 역사적 외면이 자리 잡고 있다. 19세기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운동) 과정에서 시칠리아는 주체적인 시민으로 참여하기보다 통일 주도 세력이었던 북부 피에몬테 왕국에 사실상 흡수당했다.

통일 이후에도 중앙정부는 시칠리아를 비롯한 남부를 산업화된 북부의 농업 물주이자 노동력 공급처로만 여겼다. “로마 남쪽부터는 아시아이자 아프리카”라는 북부 중심주의적 멸시와 경제적 차별은 깊은 골을 만들었다. 공업 중심의 북부와 달리 전통 농업 구조에 머물러야 했던 시칠리아는 만성적인 가난과 행정력 부재라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공권력의 부재가 낳은 비극, 자경단에서 마피아(Cosa Nostra)로

정부의 치안과 법치가 미치지 못하는 농촌 지방에서 주민들은 스스로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비공식적인 자경단을 조직했다. 하지만 지중해의 거점으로서 법보다 주먹이 가까웠던 이 자경단 구조는 점차 이권에 개입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 조직, 즉 마피아(Cosa Nostra)로 변질되었다.

마피아는 국가가 제공하지 못하는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며 민중의 삶 깊숙이 침투했고, 공포와 침묵의 규율인 ‘오메르타(Omertà)’로 사회 전체를 옥죄었다. 보호비(Pizzo) 착취와 밀수, 정ㆍ관계 결탁으로 도시는 오랜 시간 ‘치안이 불안한 위험한 섬’이라는 억울하고 어두운 불명예의 굴레를 뒤집어써야만 했다.

외로운 선구자, 리베로 그라시의 신문 편지와 비극적 피살

이처럼 공포와 침묵이 만연하던 시칠리아에서, 굴복을 거부하고 최초로 균열을 낸 이는 의류 제조업체 ‘시그마(Sigma)’를 운영하던 팔레르모의 사업가 리베로 그라시(Libero Grassi)였다. 1991년 1월 10일, 그는 지역 일간지 《조르날레 디 시칠리아(Giornal di Sicilia)》 1면에 “갈취범에게(Caro estorsore)”라는 제목의 공개 편지를 기고했다.

“친애하는 갈취범에게. 저는 당신들의 보호비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임을 밝힙니다. 제 회사는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근로자들을 고용하며, 어떠한 마피아의 횡포에도 돈을 지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편지 공개와 동시에 경찰에 마피아 갈취범들의 인적 사항을 신고하여 체포하게 만들었다.

전국 방송에 출연해 마피아를 비판하는 등 용기 있는 행보를 이어갔지만, 당대 팔레르모 사회의 반응은 차가웠다. 동료 상인들과 주민들은 “쉬쉬하며 넘어가야 할 집안의 부끄러운 얼룩을 외부에 알렸다.”, “괜히 마피아를 자극해 상권을 위험하게 만든다.”라며 오히려 그를 비난하고 외면했다.

결국 철저히 고립되었던 리베로 그라시는 공개 편지를 쓴 지 약 8개월 만인 1991년 8월 29일 아침, 집 앞 길거리에서 마피아의 총탄에 맞아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용감했던 한 시민의 비극적인 죽음은 시칠리아인들의 가슴속에 깊은 부채감과 함께 “더 이상 이 불의와 공포를 묵과할 수 없다.”는 거대한 양심의 씨앗을 심어놓았다.

피로 물든 팔레르모, 영웅들의 희생과 시민의 각성

리베로 그라시의 비극 이후에도 마피아의 광기는 멈추지 않았다. 1990년대 초, 마피아의 구조적 범죄를 파헤치던 조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 검사와 그의 동료 파올로 보르셀리노(Paolo Borsellino) 검사가 1992년 불과 두 달 간격으로 팔레르모 근교에서 마피아의 폭탄 테러로 목숨을 잃는 국가적 비극이 일어났다.

리베로 그라시의 외로운 희생에 이어 두 정의로운 법조인마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오랫동안 공포에 눌려 있던 시칠리아인들의 양심과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팔레르모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충분하다!(Basta!)”를 외쳤고, 리베로 그라시가 남긴 ‘보호비 거부’의 유지는 2004년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아디오피조(Addiopizzo, 보호비여 안녕)’ 시민 운동으로 결실을 맺었다.

“보호비를 내는 민족은 자유가 없다.”, “보호비를 내는 상인에게 물건을 사는 소비자는 마피아를 돕는 것이다.” 청년들이 팔레르모 시내에 붙인 포스터 한 장은 한때 리베로 그라시를 외면했던 도시에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상인들은 마피아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연대하여 ‘보호비 거부’ 선언을 했고, 시민과 여행자들은 ‘아디오피조 인증 가게’를 우선적으로 이용하는 착한 소비로 답했다. 공포에 굴복하지 않는 시민 의식이 수십 년간 고착화되었던 마피아의 자금줄을 마침내 끊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팔레르모, 정화의 물결 속에서 피어난 여행의 기쁨

오늘날 팔레르모의 거리를 걷는 여행자는 과거의 위험하고 어두운 도시가 아닌, 활기와 자존감으로 가득 찬 새로운 시칠리아를 만나게 된다. 마피아에게서 몰수한 부동산과 토지는 시민들을 위한 문화 공간과 유기농 농장, 공공 카페로 탈바꿈했다.

공항의 이름에서 시작된 정화의 역사는 구시가지의 시장과 활력 넘치는 골목마다 당당히 붙어 있는 아디오피조 스티커로 이어지며 방문객을 맞는다. 한때 외롭게 스러져갔던 리베로 그라시의 용기와 팔코네·보르셀리노 검사의 숭고한 피, 그리고 이에 응답한 시민들의 연대가 마침내 시칠리아를 구원해 낸 것이다.

자신의 터전을 스스로의 손으로 정화해 낸 시칠리아인들의 강인한 눈빛 속에서, 우리는 유적 감상을 넘어 한 사회가 용기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해 낸 위대한 서사를 목격하게 된다.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는 팔레르모의 카페에 앉아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 잔에는, 이제 마피아의 그늘이 아닌 자존감 높은 시칠리아인들의 당당하고 진실된 미소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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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옥 작가글 59편 · 한국어로 씁니다

울타리없는학교 교장 / 크루즈 여행 전문 인솔자 010-3261-7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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